이문열 사람의 아들 깊이 있는 고뇌
우리나라 소설의 대가인 이문열 선생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사람의 아들이라 생각한다.
이문열 선생이 풀어쓴 삼국지가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이문열이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 작품으로 인해 이문열이라는 이름은 단번에 한국 소설의 대표가 되었다. 소설의 깊이 있는 고뇌는 시대를 고민하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방대한 기독교와 주변 신화에 대한 지식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수많은 이야기의 얼개를 잘 짜인 그물처럼 탄탄하게 엮어내고 있다.
그 소설이 나오고 그 시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만큼 충격을 몰고 온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 과연 신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비록 결말이 왠지 허무해 보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지적 폭풍을 몰고 온 것은 틀림없다. 그럼 이문열 사람의 아들 줄거리는 어떤 내용일까?
기독교를 믿다 그저 희생과 사랑만 강요하는 교리에 실망한 젊은 신학도가 있다. 그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전능한 신이 약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조리를 감내하라는 교리에 실망한다. 그는 약자들을 위해 무언가 행동하는 신을 원했다. 약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뛰쳐나와 거리에서 자신의 종교를 만든다. 교리를 새로 쓰고 약자들을 위한 사회 정의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젊은이가 따르게 된다.
그 젊은이는 그를 대신해 약자들을 보살핀다. 공동체 생활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가진 자들에게서 돈을 훔쳐와 약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진다.
이를 본 신학도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과 방식이 틀릴 수도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점점 폭력으로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젊은 추종자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떠나버린다. 결국 젊은이에 의해 신학도는 죽음을 맞게 된다. 신학도가 다시 기독교로 귀의하려 하자 젊은이가 죽인 것이다.
아하스페르츠 이야기
처음에 젊은이는 신학도가 새로이 만든 교리에 열광한다. 새로운 교리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행동하는 신이다. 결코 희생을 강요하며 계속 약하게 살라고 하지 않는다.
신학도가 새로이 구성하는 경전의 내용에 아하스페르츠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예수의 40일 광야 시험 때의 이야기다. 굶주린 예수 앞에 세상의 고통에 고민하며 방황하던 아하스페르츠가 나타난다. 아니 아하스페르츠가 세상을 돌아다니다 광야에 들어갔을 때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예수를 알아보고 질문을 던진다. 돌을 빵으로 바꾸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구해주라고 한다. 그게 사랑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번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한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한다. 물론 이 요구도 거절당한다. 아하스페르츠는 예수를 향해 외친다. 빵과 권능이 있어야 사람들이 당신을 따를 것이라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그를 호되게 야단친다. 결국 아하스페르츠는 예수를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 신학도가 만든 새로운 경전의 내용이다. 결말은 신학도와 그의 제자인 젊은이는 갈라서게 된다. 갈러선 게 아니고 신학도가 젊은이를 떠난다. 젊은이의 가진 자들을 향한 폭력, 강도짓이 무서워진 것이다. 약자를 위한 사랑이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이것은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신이란 결국 기독교의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젊은이를 떠나게 되는데 나중에 젊은이는 자신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 스승인 신학도를 죽이게 된다.
이런 내용이 이러저러한 내용으로 얽히고설켜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낸 소설이다.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고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다.
결국 소설은 '신'이란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은 젊은 시절의 신학도나 그의 제자처럼 옆길로 새게 된다. 그럼 신이란 존재에 대한 질문은 무엇일까? 결국 '악'의 문제로 귀결된다.
악의 문제
여기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악이 아니다. 종교적 의미의 악은 더 포괄적이다. 정상 상태를 변질시키는 것은 악이다. 건강한 상태를 변질시키는 질병은 악이다. 배고픔도 악이다. 권력에 의한 폭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깨끗한 창조세계를 훼손시키는 것은 모두 악이다.
아하스페르츠는 예수에게 돌을 들어 빵으로 만들라고 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라는 말이다. 사실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종이 되고 자식들을 팔고 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먹는 것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상의 고통은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도 악이다.
그럼 전능한 신이 왜 이런 악을 허용하고 있을까? 다른 종교는 대부분 선신과 악신의 대결 구도를 가진다. 그래서 어느 때는 선신의 힘이 강해서 악신을 물리치고 어느 때는 악신의 힘이 강해서 선신을 물리친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결국은 선신이 악신을 완전히 무찌르고 세상은 지상낙원이 건설된다는 것이다.
가족 중의 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거나,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일구었는데 IMF가 터져서 갑자기 부도가 난다. 이런 일을 당하면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냐고 원망하게 된다.
이걸 다른 종교로 해석하면 재수 없게 악신의 힘이 셀 때에 내가 걸려든 것이 된다. 그러니 다시 선신의 힘이 세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숙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야훼 신은 절대자이다. 전지전능하다. 악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신이 어떻게 악이 활개 치도록 놔둔단 말인가? 혹시 야훼도 다른 종교처럼 때로는 악에게 지는 것이 아닌가?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석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아들에 등장하는 신학도도 결국 이런 의문에 해답을 찾지 못해 자기가 새로운 정의의 신을 만든 것이다.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너무 신앙심이 좋아 결코 야훼의 절대성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좋으나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찾으면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될 것이고 못 찾으면 다른 길로 이른바 이단으로 빠지게 된다. 자기식으로 성경과 야훼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이런 깊이의 소설을 20대 중반에 썼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은 깊이 있는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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