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에 해당하는 글 2

파르메니데스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생각하는 글|2021. 7. 1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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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사상가 파르메니데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소크라테스다. 그의 뒤를 이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제자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그걸 보면 소크라테스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 맹자는 군자삼락의 하나로 득천하영재이교육지라고 했다. 영특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라 한 것이다.

 

그런데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는 말까지 생기게 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러니 소크라테스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비록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만)

 

파르메니데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신비로운 사람을 들라면 소크라테스가 아닌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를 꼽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헤라클레이토스나 피타고라스 등도 신비한 사상가 축에 들 수는 있으나 그래도 신비함으로 따지면 파르메니데스가 한 수위다.

 

왜 그럴까? 그가 어떤 말을 했길래 그를 신비의 철학가로 만들었을까?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그는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사상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는데 위의 말을 남겼다는 것은 안다. 하도 유명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대의 인물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그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른바 만물 유전설을 주장했다. 그의 비유 중 대표적인 비유가 강물의 비유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라는 그 말이다. 이를 그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표현했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 흐르던 물이 아닌 상류에서 내려온 다른 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헸다. 즉 모든 것은 변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말과는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은 결국 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있는 것이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면 그건 있는 것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물이 수증기가 되었다 해도 여전히 물의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있음이 없음이 될 수 없고 없음이 있음으로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빈 공간이란 없다고 했다. 빈 공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책상 위의 연필과 노트는 그 사이에 빈 공간이 있기에 각기 존재할 수 있다. 빈 공간이 없다면 둘은 하나가 된다. 나누어져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라고 했다. 여기서 일자()라는 말이 나온다. 모든 것을 통일하는 것은 일자라는 말이다. 하나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모든 것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빈 공간은 없으니 모든 것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눈에는 분명 만물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절이 변함에 따라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그것이 녹아 물이 되고 또 초록잎이 빨간 잎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 그런데 왜 파르메니데스는 변하는 것은 없다고 했는가?

 

이데아의 세계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일자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일자의 개념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있음과 없음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변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니 파르메니데스의 말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 차원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 어디서 비슷한 말을 들어 본 것 같지 않은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측량할 수도 없지만 분명 존재하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이상적인 것을 영어로 하면 이데아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파르메니데스의 말과 비슷하다.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물론 파르메니데스의 영향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 뚱딴지같은 소리다. 변하는 것은 없다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자가 주는 위안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모든 것이 변한다면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좋은 것으로 변해서 나의 인생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변한다는 것이다. 내가 오랜 세월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다면 좋기만 할까? 그 세월, 지나버린 그 세월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노년의 성공과 교환하기에 젊음은 너무나 소중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서산에 지는 노을이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젊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만 있다면 우리는 허무할 수 있다. 나의 아내도 나의 자식도 나의 부모님도 나의 친구도 모두가 다 사라진다. 허상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 즐거울 수 있을까?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실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변하지만 우리가 그 안에 속해 있는 참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위안이다. 그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눈에 보이는 우리는 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참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위안이다. 존재의 위아이다.

 

그렇기에 파르메니데스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2천5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철학자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둘의 이론이 비슷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당연한 말 같지만 속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그의 가시적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추구와 확신은 플라톤뿐 아니라 지금도 많은 위안과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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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동굴의 비유

생각하는 글|2021. 7. 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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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면 동양에선 공자와 맹자가 떠오르고 서양에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떠오른다. 그만큼 그들이 철학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미국의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동양철학은 공자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바꾸어도 될만하다.

 

플라톤(Platon)

그중에서 플라톤(Platon) 이야기를 해보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기술한 책도 있고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책도 있다. 아무튼 플라톤이 남긴 철학의 유산 중에 동굴의 이유가 있다.

 

 

platon
아테네 학당의 프라톤 (가운데서 손을 위로 향한 사람)

 

동굴의 비유

그의 대표작 <국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떤 일단의 무리들이 동굴 안에 갇혀 있다. 그들은 바깥 등지고 앉아 있어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 다만 바깥에서 오는 빛에 반사되어 자신들 앞에 보이는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림자의 특성은 무엇인가? 형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물체의 진짜 모습이 아닌 변형된 모습만을 보고 있다. 그러나 계속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그들은 그것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계속 보다 보면 그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동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어둠 속에서만 살던 그는 처음엔 빛을 감당하지 못해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이 말은 진리를 접하면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처음엔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차로 빛에 눈이 적응을 하게 되고 드디어 빛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빛이 비치어 주는 온갖 사물들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어른 거리는 모습이 아닌 제대로 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형태나 색깔을 온전하게 보게 된다.

 

그는 놀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던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까? 그건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명백한 진실 앞에서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그는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아마도 그는 이전에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자기의 동료였던 이들에게 뒤를 돌아 진실을 보라고, 빛을 보고 그래서 온전한 사물의 모습을 보라고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그의 말을 들을까? 아마도 듣지 않을 것이다. 왜? 그들에게는 여전히 그림자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바깥의 빛의 세상을 보게 된다면 결국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볼 수없고 여전히 빛에 의한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실재와 허상

영화 매트릭스와 같다.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네오와 모피어스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은 생생하게 현실로 자각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데 그것이 모두 허상이라고 하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굴의 비유
동굴의 비유 그림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우리는 과연 동굴 밖에서 살고 있을까? 매트릭스를 벗어나 있을까? 아니면 동굴 안에 살면서, 그리고 매트릭스 안에 매여 살면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코기토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를 보자. 그는 어느 날 따뜻한 난로 옆에서 졸면서 철학을 한다. 그 어떤 가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전제를 발견해서 그 전제의 토대에서부터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이 허상이라 가정해 본다. 자기 부모를 생각해 보자. 사실 내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니고 나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데 나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관계는 허상일 수 있다. 여기 탁자가 있다. 그러나 악마가 나에게 여기 탁자가 있고 딱딱하다고 생각하게끔 내 생각과 감각을 조종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모든 감각 세계도 허상일 수 있다. 

그러면 수학은 어떠한가? 1 + 1 = 2라는 것이야 말로 흔들릴 수 없는 진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니다. 악마가 나로 하여금 1 + 1 = 2라고 믿게끔 사고방식을 조종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하나하나 부정해 나간다. 철학 용어로 회의해 나간다. 그러나 부정하기 위한 회의가 아닌 확실한 전제를 발견하기 위한 회의 작업이다. 그래서 이걸 가리켜 <방법적 회의>라 한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기가 아는 모든 것,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검증해 나간다. 그렇게 생각을 밀어붙이니 결국 남는 것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허상일 수 있다는 가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허무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테카르트는 한 발짝 더 나갔다.

 

그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끝에 데카르트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 이렇게 모든 것이 허상일 수 있다고 해도 여하 간에 지금 나는 생각이란 걸 하고 있지 않은가? 설령 나라는 존재도 허상이라 해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어쨌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탄생한 명언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라틴어로는 코기토 에르고 솜이라고 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가 했던 방법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어쨌든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모든 사물은 물론 자신마저 부정할 수 있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제 데카르트는 자신의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닌 불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이란 것을 눈치챘다.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그는 자신이 동굴 안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철학자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꿨다. 철학자만이 진리를 보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모드 것은 허상이다.

 

회의를 넘어 진실로

우리의 인생은 방법적 회의의 연속이다. 이것이 바른 방법인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가? 내가 사는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항상 따라붙는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회의만 하다가는 정말 회의론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결코 회의론자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회의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처럼 방법적 회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눈앞에 어른 거리는 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실제의 그림자에 불과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모두는 동굴에 살고 있다. 아니라할 수 있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갖고 싶은 것만 가지려 하는 한 그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살짝 바꿔보자. <생각하는 만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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