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에 해당하는 글 2

매트릭스 세계관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

생각하는 글|2021. 7. 8. 00:07
반응형

영화 매트릭스(Matrix) 세계관과 장자의 호접몽. 이 둘은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천 년대를 열며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매트릭스. 그 광대한 세계관으로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매트릭스 세계관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해 보자.

 

 

Matrix
매트릭스 빨간약 파란약

 

매트릭스(Matrix) 세계관

영화 매트릭스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가상의 세계이고 우리는 주입된 생각을 실제라 믿고 사는 꿈속의 인간들일뿐이라는 가설. 얼마나 충격적인가?

 

우리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실재하는 세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 폰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내 입 안으로 들어가는 고기는 분명 내 입 안에서 씹히고 있다. 그 육즙이 내 혀의 미각을 자극하고 나의 뇌는 만족을 느끼고 있다.

 

이런 것은 분명 실재하는 경험이다. 내가 턱을 괴고 있는 책상도 분명 존재하고 있고 내가 타자를 치고 있는 이 노트북도 분명 무게와 경도를 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실은 허상이고 살재라고 생각하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러한 매트릭스 세계관은 당시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호접몽. 나비인가 인간인가?

여기서 장자의 호접몽이 떠오른다. 장자는 꿈속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깨고 보니 꿈인데 너무나 생생해서 꿈속에서 자신이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인간인지 나비인지 혼동이 되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도 같다. 동굴에 갇혀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한 그림자가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매트릭스 속의 인간들과 꿈속의 장자와 동굴 속의 인간들이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실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와도 비슷하다. 모든 것을 허상이라고 의심했던 데카르트. 그야말로 이 세상이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가정을 한 최초의 철학자일 것이다. 아니 최초는 아니다. 그 이전에도 그런 가정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잠시 뒤에 보자.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만약 정말로 우리가 사는 우주가 매트릭스일 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깨닫고 빨간약을 먹으면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빨간약을 먹으면 매트릭스를 벗어난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렇까? 정말 AI가 만든 매트릭스 세상이라면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AI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혹은 어떤 우주의 지성이 만든 것이라면 빨간약으로 매트릭스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트릭스일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에도 있었다. 석가모니가 그렇고 예수가 그렇고 대부분의 종교 창시자들이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매트릭스를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이를 위해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석가모니는 참선과 수양을 통해 인연을 벗어나면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일명 불가의 해탈이다. 얽혀 있는 인연은 영화 속 매트릭스 같다. 상황들이 서로 연관되어 이어지는 매트릭스와 서로 간에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 간의 인연이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불가에서는 해탈(매트릭스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모든 인연을 끊으라고 한다.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경전을 외우고 참선을 하면 매트릭스를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그러한 공부를 통하여 우주의 구조를 파악한다는 것이 아닐까? 구조를 파악하여 이해하게 되면 더 이상 그 구조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모르니 붙잡혀 있는 것이다. 알고 나면 자유로울 수 있다.

 

수학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문제에 얽매이게 된다.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공식을 이해하게 되면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가 전파한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에서는 그런 방법이나 수양법으로는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매트릭스를 만든 존재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장 속의 새가 새장의 구조를 깨닫게 된다고 해서 새장을 나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새가 자유로워지려면 새장의 주인이 새장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즉 위로부터의 은혜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

 

그래서 종교는 철학과 비슷하면서도 그 태생이 다르다. 철학은 매트릭스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고, 종교는 매트릭스를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 근본이 다르다.

 

실재하기

매트릭스가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세상과 우주의 법칙이란 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주가 존재하는 자체가 무언가 법칙이 있어 그 법칙 안에서 행성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법칙에서 벗어난 행성은 충돌하여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면 삶의 법칙도 존재하지 않을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가정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매트릭스를 벗어나고자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딴다. 투잡을 하고 투자를 한다.

 

영화에서 그리는 매트릭스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붙잡고 있는 매트릭스는 있을 것이다. 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인생의 변화가 없고 발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보면 종교적으로 큰 뜻이 있는 사람은 별개로 하고 보통의 우리들에게는 매트릭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는 자체가 중요해진다. 매트릭스가 존재하건 안 하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한계 내에서 꿈쩍 못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구하는 빨간약이다. 비록 새장 안에 갇혀 있다 해도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는 한 새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인간이든 나비이든 날개짓을 하는 한 나는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인 것이다.

반응형

댓글()

플라톤 동굴의 비유

생각하는 글|2021. 7. 6. 22:59
반응형

철학하면 동양에선 공자와 맹자가 떠오르고 서양에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떠오른다. 그만큼 그들이 철학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미국의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동양철학은 공자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바꾸어도 될만하다.

 

플라톤(Platon)

그중에서 플라톤(Platon) 이야기를 해보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기술한 책도 있고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책도 있다. 아무튼 플라톤이 남긴 철학의 유산 중에 동굴의 이유가 있다.

 

 

platon
아테네 학당의 프라톤 (가운데서 손을 위로 향한 사람)

 

동굴의 비유

그의 대표작 <국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떤 일단의 무리들이 동굴 안에 갇혀 있다. 그들은 바깥 등지고 앉아 있어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 다만 바깥에서 오는 빛에 반사되어 자신들 앞에 보이는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림자의 특성은 무엇인가? 형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물체의 진짜 모습이 아닌 변형된 모습만을 보고 있다. 그러나 계속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그들은 그것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계속 보다 보면 그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동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어둠 속에서만 살던 그는 처음엔 빛을 감당하지 못해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이 말은 진리를 접하면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처음엔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차로 빛에 눈이 적응을 하게 되고 드디어 빛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빛이 비치어 주는 온갖 사물들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어른 거리는 모습이 아닌 제대로 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형태나 색깔을 온전하게 보게 된다.

 

그는 놀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던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까? 그건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명백한 진실 앞에서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그는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아마도 그는 이전에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자기의 동료였던 이들에게 뒤를 돌아 진실을 보라고, 빛을 보고 그래서 온전한 사물의 모습을 보라고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그의 말을 들을까? 아마도 듣지 않을 것이다. 왜? 그들에게는 여전히 그림자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바깥의 빛의 세상을 보게 된다면 결국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볼 수없고 여전히 빛에 의한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실재와 허상

영화 매트릭스와 같다.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네오와 모피어스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은 생생하게 현실로 자각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데 그것이 모두 허상이라고 하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굴의 비유
동굴의 비유 그림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우리는 과연 동굴 밖에서 살고 있을까? 매트릭스를 벗어나 있을까? 아니면 동굴 안에 살면서, 그리고 매트릭스 안에 매여 살면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코기토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를 보자. 그는 어느 날 따뜻한 난로 옆에서 졸면서 철학을 한다. 그 어떤 가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전제를 발견해서 그 전제의 토대에서부터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이 허상이라 가정해 본다. 자기 부모를 생각해 보자. 사실 내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니고 나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데 나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관계는 허상일 수 있다. 여기 탁자가 있다. 그러나 악마가 나에게 여기 탁자가 있고 딱딱하다고 생각하게끔 내 생각과 감각을 조종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모든 감각 세계도 허상일 수 있다. 

그러면 수학은 어떠한가? 1 + 1 = 2라는 것이야 말로 흔들릴 수 없는 진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니다. 악마가 나로 하여금 1 + 1 = 2라고 믿게끔 사고방식을 조종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하나하나 부정해 나간다. 철학 용어로 회의해 나간다. 그러나 부정하기 위한 회의가 아닌 확실한 전제를 발견하기 위한 회의 작업이다. 그래서 이걸 가리켜 <방법적 회의>라 한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기가 아는 모든 것,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검증해 나간다. 그렇게 생각을 밀어붙이니 결국 남는 것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허상일 수 있다는 가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허무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테카르트는 한 발짝 더 나갔다.

 

그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끝에 데카르트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 이렇게 모든 것이 허상일 수 있다고 해도 여하 간에 지금 나는 생각이란 걸 하고 있지 않은가? 설령 나라는 존재도 허상이라 해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어쨌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탄생한 명언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라틴어로는 코기토 에르고 솜이라고 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가 했던 방법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어쨌든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모든 사물은 물론 자신마저 부정할 수 있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제 데카르트는 자신의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닌 불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이란 것을 눈치챘다.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그는 자신이 동굴 안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철학자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꿨다. 철학자만이 진리를 보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모드 것은 허상이다.

 

회의를 넘어 진실로

우리의 인생은 방법적 회의의 연속이다. 이것이 바른 방법인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가? 내가 사는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항상 따라붙는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회의만 하다가는 정말 회의론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결코 회의론자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회의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처럼 방법적 회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눈앞에 어른 거리는 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실제의 그림자에 불과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모두는 동굴에 살고 있다. 아니라할 수 있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갖고 싶은 것만 가지려 하는 한 그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살짝 바꿔보자. <생각하는 만큼 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