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기적이다. 과연 그럴까?

생각하는 글|2021. 8.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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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선행을 하는 것도 자기희생을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기에게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기까지 하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족 보존을 위해 더 좋은 것이라는 유전자가 인간에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선행도 이기심의 발로였는지 알아보자.

 

1. 인간은 이기적이다

링컨 대통령이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있었다. 둘의 대화 도중에 링컨은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 마차가 웅덩이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웅덩이 옆에서 어미 돼지가 크게 울고 있었다. 보니 웅덩이에 새끼 돼지들이 빠져 있었다.

 

마차는 웅덩이를 지나갔다. 그러나 잠시 후 링컨을 마차를 세운 뒤 뛰어내려 웅덩이로 달려가서 새끼돼지들을 구해 주었다. 마차로 돌아온 링컨에게 친구가 말했다.

 

"자네가 지금 한 행동을 이기적이라 할 수 있나? 돼지를 구해줬다고 자네에게 이득이 생기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자 링컨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보게, 저 돼지새끼들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그 생각에 괴로웠을 것일세. 그러니 나 편하자고 한 일이니 이기적이지 않겠는가?"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링컨과 같은 말을 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모든 것이 자신의 만족을 위함일까?

 

 

 

2. 이기주의와 자기 이익

이기주의라 함은 뭔가 자기 이익이 있어야 한다. 자기 이익이 없는 행동을 이기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예는 어떻까?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병원에 갔다. 이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 한 행동이다. 즉,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아파서 병원에 간 사람에게 이기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타인과 관계있는 말이다. 타인에게 손해가 있을 수 있음에도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을 할 때 이기적이라고 한다. 타인과 관계없이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을 이기적이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 이익이란 것도 병원에 가는 사람의 예에서 보듯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저속한 의미의 이익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3. 자기 이익과 쾌락 추구

우리의 행위 중에는 쾌락, 즉 즐거움을 위해 하는 행동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과음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이기적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행동은 자기에게 손해다. 그들은 단지 자기 즐거움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할 뿐이다. 즉 쾌락의 추구가 이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링컨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돼지새끼들을 구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구해줬다. 이것을 심리적 이기주의라 한다. 링컨의 행동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 자기 마음이 편하고자 한 행동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할 만큼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가 링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다. 만약 쾌락을 주는 것이라 한다면 그 쾌락은 우리가 생각하는 쾌락이 아닌 에피쿠로스적인 쾌락, 즉 마음의 평화다. 심리적 이기주의는 우리가 하는 선행을 모두 심리적 이기주의라 본다. 자기 마음이 좋자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선행을 하는 많은 경우는 자기 마음의 즐거움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그러는 사람도 있겠으나 정상적인 경우는 자기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 선행을 하고 자선을 베풀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심리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심리적 평안 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숭고한 희생도 있다

대부분의 선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에서 시작한다. 즐거움을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괴로움을 떨치고자 하는 행동이다. 그것도 자기 마음의 평안이라는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경우는 어떤가? 그것이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해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 앞에서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렇게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억지 주장이다. 심리적 이기주의는 이타적 행동이 자기만족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이타적 행동을 연관 짓는 것에는 뭔가 동의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있다. 거기엔 우리를 저항케 하는 뭔가가 있다.

 

자기만족이라는 말에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타인보다 자기를 우선시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위한 자선과 희생이 타인을 고려하고 자기보다 타인을 우선하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말, 심리적 이기주의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그 표현이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숭고한 희생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 도덕철학의 기초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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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2021. 8. 1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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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EUREKA)

몇 해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영화 인터스텔라. 영화 중의 한 장면이다.

 

 

 

"유레카!"(EUREKA!)

과학자가 된 주인공의 딸이 인류를 구원해 줄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소리치는 장면이다. 

 

무언가 큰 발견을 했을 때 유레카라고 소리친다. 유레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알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서 유래한다.

 

아르키메데스

시칠리아에 히에론 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황금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궁금했다. 혹시 은을 섞어 놓고 황금 왕관이라 속인 것인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일을 맡겼다. 황금인지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를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당시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사람이었다. 후에 그는 로마가 침공했을 때 돋보기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울에 태양빛을 반사시키는 방식으로 로마 함선을 불태우기도 했었다. 로마에게 함락이 되었을 때는 수학적 원리를 발견한다고 골몰하고 있는 통에 당장 떠나라는 로마 군인의 명령을 무시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그는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판별하는 방법을 찾느라 골몰하였으나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욕탕에 갔다. 그리고 탕 안에 들어가자 물이 탕 밖으로 넘쳤다. 이를 본 그는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물체의 밀도에 따라 물이 넘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황금 왕관을 물속에 넣고 넘치는 물의 양을 쟀다. 다음엔 황금 왕관과 같은 무게의 황금을 물속에 넣어서 넘치는 물의 양을 비교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왕관에 순수 황금이 아닌 불순물이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그는 처음 목욕탕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물 밖으로 튀어나오며 유레카(EUREKA)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후로 중요한 발견의 순간에는 유레카라고 외치게 되었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

그러면 그는 어떻게 목욕탕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는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지친 그는 목욕탕에서 잠시 쉬고자 했던 것이다. 그 쉼의 순간에 유레카가 찾아온 것이다.

 

고민을 하고 방법을 연구할 때는 여러 정보들이 뒤섞이게 된다. 이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한 줄로 통합돼야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 보면 드디어 모든 정보들을 한 줄로 늘어놓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여러 정보들이 얽히고설켜서 한 줄로 서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그냥 쉬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자꾸 연구만 계속하다 보면 더 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정보들을 놓아주면 그 정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 유기적 연관성을 드러낼 수가 있다. 그 순간 유레카가 다가오는 것이다.

 

무언가 고민되는 일이 있는가? 그럼 먼저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정보들을 끌어 모을 수가 있다. 만약 정보는 충분한데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을 취하는 것도 방법이다. 잠시 그 고민들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 휴식 속에서 유레카는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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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사람의 아들 깊이 있는 고뇌

생각하는 글|2021. 8. 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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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소설의 대가인 이문열 선생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사람의 아들이라 생각한다.

이문열 선생이 풀어쓴 삼국지가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이문열이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 작품으로 인해 이문열이라는 이름은 단번에 한국 소설의 대표가 되었다. 소설의 깊이 있는 고뇌는 시대를 고민하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방대한 기독교와 주변 신화에 대한 지식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수많은 이야기의 얼개를 잘 짜인 그물처럼 탄탄하게 엮어내고 있다.

 

그 소설이 나오고 그 시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만큼 충격을 몰고 온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 과연 신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비록 결말이 왠지 허무해 보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지적 폭풍을 몰고 온 것은 틀림없다. 그럼 이문열 사람의 아들 줄거리는 어떤 내용일까? 

 

기독교를 믿다 그저 희생과 사랑만 강요하는 교리에 실망한 젊은 신학도가 있다. 그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전능한 신이 약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조리를 감내하라는 교리에 실망한다. 그는 약자들을 위해 무언가 행동하는 신을 원했다. 약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뛰쳐나와 거리에서 자신의 종교를 만든다. 교리를 새로 쓰고 약자들을 위한 사회 정의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젊은이가 따르게 된다.

 

그 젊은이는 그를 대신해 약자들을 보살핀다. 공동체 생활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가진 자들에게서 돈을 훔쳐와 약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진다.

 

이를 본 신학도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과 방식이 틀릴 수도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점점 폭력으로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젊은 추종자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떠나버린다. 결국 젊은이에 의해 신학도는 죽음을 맞게 된다. 신학도가 다시 기독교로 귀의하려 하자 젊은이가 죽인 것이다.

 

 

 

아하스페르츠 이야기

처음에 젊은이는 신학도가 새로이 만든 교리에 열광한다. 새로운 교리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행동하는 신이다. 결코 희생을 강요하며 계속 약하게 살라고 하지 않는다.

 

신학도가 새로이 구성하는 경전의 내용에 아하스페르츠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예수의 40일 광야 시험 때의 이야기다. 굶주린 예수 앞에 세상의 고통에 고민하며 방황하던 아하스페르츠가 나타난다. 아니 아하스페르츠가 세상을 돌아다니다 광야에 들어갔을 때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예수를 알아보고 질문을 던진다. 돌을 빵으로 바꾸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구해주라고 한다. 그게 사랑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번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한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한다. 물론 이 요구도 거절당한다. 아하스페르츠는 예수를 향해 외친다. 빵과 권능이 있어야 사람들이 당신을 따를 것이라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그를 호되게 야단친다. 결국 아하스페르츠는 예수를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 신학도가 만든 새로운 경전의 내용이다. 결말은 신학도와 그의 제자인 젊은이는 갈라서게 된다. 갈러선 게 아니고 신학도가 젊은이를 떠난다. 젊은이의 가진 자들을 향한 폭력, 강도짓이 무서워진 것이다. 약자를 위한 사랑이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이것은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신이란 결국 기독교의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젊은이를 떠나게 되는데 나중에 젊은이는 자신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 스승인 신학도를 죽이게 된다.

 

이런 내용이 이러저러한 내용으로 얽히고설켜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낸 소설이다.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고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다.

 

결국 소설은 '신'이란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은 젊은 시절의 신학도나 그의 제자처럼 옆길로 새게 된다. 그럼 신이란 존재에 대한 질문은 무엇일까? 결국 '악'의 문제로 귀결된다.

 

 

 

악의 문제

여기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악이 아니다. 종교적 의미의 악은 더 포괄적이다. 정상 상태를 변질시키는 것은 악이다. 건강한 상태를 변질시키는 질병은 악이다. 배고픔도 악이다. 권력에 의한 폭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깨끗한 창조세계를 훼손시키는 것은 모두 악이다.

 

아하스페르츠는 예수에게 돌을 들어 빵으로 만들라고 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라는 말이다. 사실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종이 되고 자식들을 팔고 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먹는 것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상의 고통은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도 악이다.

 

그럼 전능한 신이 왜 이런 악을 허용하고 있을까? 다른 종교는 대부분 선신과 악신의 대결 구도를 가진다. 그래서 어느 때는 선신의 힘이 강해서 악신을 물리치고 어느 때는 악신의 힘이 강해서 선신을 물리친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결국은 선신이 악신을 완전히 무찌르고 세상은 지상낙원이 건설된다는 것이다.

 

가족 중의 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거나,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일구었는데 IMF가 터져서 갑자기 부도가 난다. 이런 일을 당하면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냐고 원망하게 된다.

 

이걸 다른 종교로 해석하면 재수 없게 악신의 힘이 셀 때에 내가 걸려든 것이 된다. 그러니 다시 선신의 힘이 세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숙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야훼 신은 절대자이다. 전지전능하다. 악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신이 어떻게 악이 활개 치도록 놔둔단 말인가? 혹시 야훼도 다른 종교처럼 때로는 악에게 지는 것이 아닌가?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석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아들에 등장하는 신학도도 결국 이런 의문에 해답을 찾지 못해 자기가 새로운 정의의 신을 만든 것이다.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너무 신앙심이 좋아 결코 야훼의 절대성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좋으나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찾으면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될 것이고 못 찾으면 다른 길로 이른바 이단으로 빠지게 된다. 자기식으로 성경과 야훼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이런 깊이의 소설을 20대 중반에 썼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은 깊이 있는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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