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동굴의 비유

생각하는 글|2021. 7. 6. 22:59
반응형

철학하면 동양에선 공자와 맹자가 떠오르고 서양에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떠오른다. 그만큼 그들이 철학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미국의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동양철학은 공자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바꾸어도 될만하다.

 

플라톤(Platon)

그중에서 플라톤(Platon) 이야기를 해보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기술한 책도 있고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책도 있다. 아무튼 플라톤이 남긴 철학의 유산 중에 동굴의 이유가 있다.

 

 

platon
아테네 학당의 프라톤 (가운데서 손을 위로 향한 사람)

 

동굴의 비유

그의 대표작 <국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떤 일단의 무리들이 동굴 안에 갇혀 있다. 그들은 바깥 등지고 앉아 있어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 다만 바깥에서 오는 빛에 반사되어 자신들 앞에 보이는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림자의 특성은 무엇인가? 형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물체의 진짜 모습이 아닌 변형된 모습만을 보고 있다. 그러나 계속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그들은 그것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계속 보다 보면 그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동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어둠 속에서만 살던 그는 처음엔 빛을 감당하지 못해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이 말은 진리를 접하면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처음엔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차로 빛에 눈이 적응을 하게 되고 드디어 빛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빛이 비치어 주는 온갖 사물들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어른 거리는 모습이 아닌 제대로 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형태나 색깔을 온전하게 보게 된다.

 

그는 놀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던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까? 그건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명백한 진실 앞에서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그는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아마도 그는 이전에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자기의 동료였던 이들에게 뒤를 돌아 진실을 보라고, 빛을 보고 그래서 온전한 사물의 모습을 보라고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그의 말을 들을까? 아마도 듣지 않을 것이다. 왜? 그들에게는 여전히 그림자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바깥의 빛의 세상을 보게 된다면 결국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볼 수없고 여전히 빛에 의한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실재와 허상

영화 매트릭스와 같다.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네오와 모피어스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은 생생하게 현실로 자각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데 그것이 모두 허상이라고 하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굴의 비유
동굴의 비유 그림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우리는 과연 동굴 밖에서 살고 있을까? 매트릭스를 벗어나 있을까? 아니면 동굴 안에 살면서, 그리고 매트릭스 안에 매여 살면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코기토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를 보자. 그는 어느 날 따뜻한 난로 옆에서 졸면서 철학을 한다. 그 어떤 가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전제를 발견해서 그 전제의 토대에서부터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이 허상이라 가정해 본다. 자기 부모를 생각해 보자. 사실 내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니고 나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데 나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관계는 허상일 수 있다. 여기 탁자가 있다. 그러나 악마가 나에게 여기 탁자가 있고 딱딱하다고 생각하게끔 내 생각과 감각을 조종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모든 감각 세계도 허상일 수 있다. 

그러면 수학은 어떠한가? 1 + 1 = 2라는 것이야 말로 흔들릴 수 없는 진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니다. 악마가 나로 하여금 1 + 1 = 2라고 믿게끔 사고방식을 조종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하나하나 부정해 나간다. 철학 용어로 회의해 나간다. 그러나 부정하기 위한 회의가 아닌 확실한 전제를 발견하기 위한 회의 작업이다. 그래서 이걸 가리켜 <방법적 회의>라 한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기가 아는 모든 것,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검증해 나간다. 그렇게 생각을 밀어붙이니 결국 남는 것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허상일 수 있다는 가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허무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테카르트는 한 발짝 더 나갔다.

 

그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끝에 데카르트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 이렇게 모든 것이 허상일 수 있다고 해도 여하 간에 지금 나는 생각이란 걸 하고 있지 않은가? 설령 나라는 존재도 허상이라 해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어쨌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탄생한 명언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라틴어로는 코기토 에르고 솜이라고 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가 했던 방법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어쨌든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모든 사물은 물론 자신마저 부정할 수 있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제 데카르트는 자신의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닌 불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이란 것을 눈치챘다.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그는 자신이 동굴 안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철학자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꿨다. 철학자만이 진리를 보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모드 것은 허상이다.

 

회의를 넘어 진실로

우리의 인생은 방법적 회의의 연속이다. 이것이 바른 방법인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가? 내가 사는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항상 따라붙는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회의만 하다가는 정말 회의론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결코 회의론자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회의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처럼 방법적 회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눈앞에 어른 거리는 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실제의 그림자에 불과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모두는 동굴에 살고 있다. 아니라할 수 있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갖고 싶은 것만 가지려 하는 한 그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살짝 바꿔보자. <생각하는 만큼 산다>.

반응형

댓글()